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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노준택의 영감은 자연에서 온다 2022-11-01 / 246

노준택 로가이엔지 대표의 목표는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지형 그대로의 골프 코스를 만드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노 대표의 코스들이 골프 코스계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작업한 코스에서 플레이한다면 홀 캐릭터를 중시하고 다름과 특별함을 강조한 스타일에 반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한 코스를 만들고 있다.

사진_박남규
사진_박남규

무심한 듯 독특하게, 노준택 코스

올해만큼 ‘골프’가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며 호황인 적이 있었나 싶다. 코로나19로 인한 국내 여가 문화의 변화, MZ세대 골퍼의 급부상,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 대중문화계. 3박자가 맞아떨어져 골프는 한 뼘 더 대중에 가까워졌다. ‘최고가 되려면 최고를 만나라’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골프에서 누구보다 최고이고 싶은 이들은 최고의 골프 코스를 찾았다. 이왕이면 더 좋은 곳으로, 더 유명한 곳으로, 더 근사한 곳으로.

늘어나는 골퍼의 수준 높아진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바빠진 건 국내 골프장이었다. 새로운 코스 조성을 위해 부지를 찾고 개발을 검토하는가 하면, 기존 코스의 리노베이션을 전격 단행하기도 한다. 덩달아 코스 설계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잭 니클라우스, 앨리스터 매켄지,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 빌 쿠어와 벤 크렌쇼, 카일 필립스, 페리 오 다이 등의 외국인 설계가도 있지만 우리 땅, 우리 지형을 잘 아는 국내 설계가들이 부상했다.

한국 골프 코스 설계 2세대로 꼽히는 노준택 로가이엔지 대표는 2000년부터 코스 설계에 뛰어들었다. 2005년 스카이72 하늘 코스를 시작으로 베어크리크, 웰링턴, 스카이뷰, 마이다스레이크이천, 유니아일랜드, 베어크리크춘천, 그리고 최근의 성문안까지 효율적인 코스 리노베이션은 물론 자연 속 골프장의 특성을 잘 살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골프매거진코리아>는 2년에 한 번, 짝수 해에 대한민국 최고의 퍼블릭 코스를 선정, 발표한다. 노준택 대표가 설계한 코스는 ‘2022-2023 대한민국 10대 퍼블릭 코스’에서 톱 10에 2곳, 톱 30에는 총 5곳이 올랐다.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설계가를 위한 순위도 매겨주길 바란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진 노 대표에게 5곳의 골프 코스. 베어크리크춘천, 베어크리크포천(크리크), 설해원(샐몬-씨뷰), 스카이 72(하늘), 마이다스레이크이천(올림푸스-타이탄)과 설계 철학, 그리고 설계가로서의 원동력에 대해 물었다.

설계가로서 첫 프로젝트가 스카이72(하늘)다.
오렌지엔지니어링 입사 연도가 2000년 5월이다. 그 이듬해 스카이72 작업을 시작했고 2003년에 설계를 끝냈으니, 어찌 보면 내 이름을 단 골프장이 세상에 나온 지 딱 20년 된 것 같다. 젊은 혈기로 작업을 맡았는데, 그땐 참 미쳐 있었다. 설계가로서 고집도 많이 부렸다. 그런데 그 날것의 느낌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오히려 주저할 수 있는 것들이 그때는 거침이 없었다. 아, 스카이72 작업을 하면서 사람들이 레이크 링크스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비거리가 정직하게 나오는 플레이를 골퍼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더라.

마이다스레이크이천 마스터플랜. 이미지_로가이엔지
마이다스레이크이천 마스터플랜. 이미지_로가이엔지

마이다스레이크이천 역시 완만한 구릉지에 설계됐다.
설계 의뢰를 받은 땅 중에 가장 완만한 구릉지였다(고저 차가 30m 이내 구릉지와 평원에 조성). 이 지형을 어떻게 특색 있게 만들지 고민을 많이 했다. 우선 클럽하우스 앞에 아주 큰 호수를 만들었다. 통상 4개 홀이 들어갈 면적에 2개 홀과 호수를 넣었음에도 소유주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은 모두가 좋아하는 스폿이 됐다. 계곡과 능선, 평지 등 기존 지형의 재해석, 원래의 숲과 계곡, 물길 등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작업했다.

베어크리크포천 크리크 코스 마스터플랜. 이미지_로가이엔지
베어크리크포천 크리크 코스 마스터플랜. 이미지_로가이엔지

베어크리크포천(크리크)은 리노베이션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참 많이 했고, 사측과 회의도 치열했던 프로젝트다. 설계 기간만 무려 2년 걸렸고, 외국인 셰이퍼가 4명이나 참여한 큰 공사였다. 기능을 완전히 만족시키면서도 좋은 코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는데 결과가 잘 나온 것 같다. 산과 땅을 아우르고 그 흐름을 느끼며 라운드할 수 있게 했다. 크리크라는 이름에 맞는 실개천을 그린 위로 올려놓았다. 내가 지금까지 설계가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곳이라 생각한다.

같은 회사의 다른 골프장, 베이크리크춘천은 어떠한가?
다른 회사가 진행하다가 부도가 나고 방치되어 땅의 훼손이 생각보다 컸다. 원래대로 복원하는 작업을 먼저 진행했다. 어떻게 하면 이 뼈대로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100%를 고스란히 구현한 곳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설계 작업을 하는 1년 동안 공사 업체도 회의에 함께 참여했다.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공사 기간 역시 3년 정도로 무척 길었는데, 매주 한두 번씩 공사 현장에 갔으니 코스 구석구석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코스 오픈 후에도 자주 방문하는지 궁금하다.
설계 그대로 잘 유지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점검 라운드를 한다. 골프장 측에서 먼저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크리크 코스는 만들어진 지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그러다 보니 깎는 사람에 따라 잔디 라인이 바뀔 수밖에 없다. 10년 되던 해에 2년에 걸쳐 매달 직원 교육을 진행했다. 결국 잔디 라인을 처음 모습 그대로 만들어놓았다.

사진_박남규
사진_박남규

골프장 설계 스타일도 시대별로 달라진다.
박사 논문으로 ‘한국 골프 코스 디자인의 시계열적 변화 특성’을 발표했다. 그때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참 재미나게도 골프장은 여전히 30~40년 된 올드 코스를 답습하고 있었다. 물론 새로운 트렌드를 입히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맞춰 디자인할 수밖에 없다. 해외의 유명한 벙커 스타일이 한때 우리나라에 유행했는데, 장맛비 한 번 오면 다 쓸려 내려가서 보수하고, 다시 무너지면 보수하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벙커는 다시 자연스레 잔디와 호흡을 맞춘다. 한국의 지형과 날씨와 맞춘 코스, ‘한국형 골프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한국형 골프장이 갖춰야 할 요소가 무엇일까?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를 견뎌야 하고, 겨울철에는 얼었다 녹았다 하는 날씨와 폭설에도 대비해야 한다. 봄과 가을에는 골퍼들이 엄청나게 몰린다. 한국형 골프장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많은 내장객을 담아내려면 접근 동선을 많이 나눠줄 수밖에 없다. 동선을 최대한 많이 열어주는 부분은 정말 필요하다. 크리크 코스를 작업하면서 느꼈던 부분이다. 카트가 감싸고 가면 다 동선이 된다. 티잉 구역이나 그린의 사이즈 역시 적절해야 한다.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으면 손님을 많이 받을 수 없다. 나는 퍼블릭 코스라면 720~750㎡ 정도로 그린을 세팅한다.

그렇다면 노준택만의 설계 스타일이 궁금하다.
내 근간은 조경이다. 조경을 단순히 꽃이나 나무를 심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경은 영어로 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 전체 땅의 경관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게 생긴 땅을 어떻게 바꾸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그래서 나는 땅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공부한다.

땅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땅이 주어지면 이 땅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특색을 어떻게 덜 훼손하면서(상처를 최소화하면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전략과 플랜은 고민하면 어떻게든 다 나오게 되어 있다. 그 단계를 넘어서려면 땅에 상처를 적게 주면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땅이 가진 특색을 잘 읽어내는 것이 진정한 차별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 단계의 작업에 가장 집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상처를 최소화해 작업한 곳으로 설해원 올드 코스를 꼽는다. 산줄기를 깎지 않고 직접 그 위에 홀을 만들었다. 원래의 지형을 최대한 살린 채 산줄기 고도를 낮췄다. 여기서 얻은 흙으로는 낮은 쪽을 돋우는 데 활용했다.

사진_박남규
사진_박남규

실제 설계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설계가의 머릿속에 있는 걸 다 쏟아내는 것이 기본 설계다. 토지가 주어지면 먼저 지형을 읽어야 한다. ‘클럽하우스는 이곳에, 출발은 여기서,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등 경관적으로 중요한 임팩트를 주는 주요 뼈대를 우선 몇 개 잡는다. 그다음 전략적 코스 배치(레이아웃)는 어마어마한 퍼즐 놀이와 같다. 이렇게도 돌려봤다가 저렇게도 돌려봤다가.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코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스토리도 함께 넣는다. 그러다 보니 다작하는 스타일은 못 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골프 코스의 단골 홍보 문구다.
자연을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품이 든다. 가장 ‘자연’스럽다고 하는 걸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공사 기간도 두 배 정도 늘어난다. 만들어놓은 다음에도 관리 운영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다. ‘2022-2023 대한민국 10대 퍼블릭 코스’ 순위에 오른 골프 코스들은 영속성을 갖췄다는 말과 같다. 내가 생각하는 명문 코스란 세월과 시간의 영속성을 가지고 있어, 언제 가도 항상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20년 넘게 설계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매력적인 일이다. (골프로) 놀아도 일하는 거고, 일해도 노는 거다. 노는데 돈까지 번다. 얼마나 행복한가. 여기에 자연과 나눈 대화로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좋은 평가까지 받는다면 어마어마한 희열이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은 고민이 된다. 뭔가 새로운 시도보다 기존 것을 답습하려고 한다든지, 젊은 시절 떠올렸던 생각과 완숙기에 접어든 현재의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좋은 노하우 혹은 축적된 경험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어 항상 경계하고 있다.

앞으로 3, 4세대 설계가들이 배출될 것이다.
물론이다. 그들에게 최대한 지형을 많이 읽고 공부 역시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소유주를 만나거나 자문을 해줄 때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설계가를 괴롭히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부끄럽게도 땅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사람은 설계가가 아닌 소유주다. 오너 이상의 고민은 못 하겠지만, 그에 준하는 고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계가가 괴로워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고민을 최대한 많이 할수록 자연은 무언가 좋은 것으로 보답해준다. 현장에 많이 나갈수록 얻어낼 수 있는 것도 많다. 근데 설계가는 왜 현장에서 인기가 없을까(웃음). 인기는 없지만 자주 얼굴을 비추길 바란다.